<현대 면역학> I.4.1 항원결정기(Epitope): 면역계가 조준하는 진짜 ‘표적지’와 항원의 조건

항원의 자격 조건: 무엇이 면역 반응을 유발하는가?

우리 주변에는 수많은 외부 물질이 존재하지만, 우리 몸의 면역계는 그 모든 것에 반응하지 않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우리는 끊임없는 알레르기 반응과 염증 속에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면역계는 특정 조건을 만족하는 물질만을 ‘공격할 가치가 있는 적’으로 판단하여 강력한 면역 반응을 일으킵니다. 항체나 림프구에 의해 인식되는 모든 물질을 넓은 의미에서 ‘항원(Antigen)’이라고 하지만, 그중에서도 실제로 강력한 면역 반응을 유발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항원을 특별히 ‘면역원(Immunogen)’이라고 부릅니다.1 그렇다면 어떤 물질이 면역계의 집중 공격을 받는 ‘면역원’이 될 수 있을까요? 그 까다로운 자격 조건들을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비자기 (Non-self) – 가장 기본적인 조건

면역 반응의 가장 근본적인 원칙은 ‘자기(self)’와 ‘비자기(non-self)’를 구별하는 것입니다. 우리 면역 시스템은 태어날 때부터 ‘아군’, 즉 우리 몸을 구성하는 성분들에 대해서는 반응하지 않도록 ‘관용(tolerance)’ 상태를 배웁니다. 따라서 면역 반응을 일으키는 첫 번째 조건은 외부에서 들어온 이물질, 즉 ‘비자기’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균, 바이러스, 곰팡이, 이식된 장기 등이 모두 여기에 해당합니다. 간혹 이 구별 시스템에 문제가 생겨 우리 몸의 성분을 적으로 오인하고 공격하는 경우가 발생하는데, 이것이 바로 ‘자가면역질환’입니다.

충분한 분자량 (Molecular Size)

일반적으로 우리 면역계는 너무 작은 물질은 위협으로 간주하지 않고 그냥 지나치는 경향이 있습니다. 강력한 면역원이 되기 위해서는 보통 최소 5,000~10,000 달톤(Da) 이상의 충분히 큰 분자량을 가져야 합니다.2 분자가 클수록 면역세포의 눈에 잘 띄고, 다양한 구조를 가질 가능성이 높아 더 효과적으로 면역 반응을 자극할 수 있습니다.

작은 물질의 반란, 합텐(Hapten)

하지만 여기에는 흥미로운 예외가 있습니다. 어떤 물질들은 분자량이 너무 작아 그 자체만으로는 면역 반응을 전혀 일으키지 못하지만, 우리 몸의 단백질(예: 알부민)과 같은 거대한 ‘운반체(carrier)’ 분자와 결합하면 비로소 면역계의 레이더에 포착됩니다. 이렇게 혼자서는 항원이 될 수 없지만 운반체와 결합하여 항원성을 띠게 되는 작은 물질을 ‘합텐(Hapten)’이라고 부릅니다.3

대표적인 예가 바로 페니실린 쇼크나 옻 알레르기입니다. 페니실린 자체나 옻나무의 우루시올 성분은 매우 작은 분자이지만, 이것이 우리 몸의 단백질과 결합하면 새로운 항원결정기를 형성하여 강력한 알레르기 반응을 유발할 수 있습니다. 이는 마치 작은 칼 자체는 위협적이지 않지만, 인질(운반체)을 잡고 있는 칼은 큰 위협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화학적 복잡성 (Chemical Complexity)

단순함은 면역계를 자극하지 못합니다. 면역원이 되기 위한 또 다른 중요한 조건은 화학적으로 복잡한 구조를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동일한 단위가 무한히 반복되는 구조를 가진 녹말이나 플라스틱, 나일론과 같은 합성 고분자는 면역 반응을 거의 일으키지 않습니다. 하지만 20종류의 아미노산이 다양한 순서와 방식으로 결합하여 복잡한 3차원 구조를 이루는 ‘단백질’은 우리 몸에 가장 강력한 면역원으로 작용합니다. 화학적으로 복잡한 구조는 면역세포가 인식할 수 있는 다채로운 형태의 항원결정기를 제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안정성과 분해 가능성 (Stability & Degradability)

마지막 조건은 다소 역설적으로 들릴 수 있습니다. 좋은 항원은 체내의 여러 효소에 의해 너무 빨리 분해되지 않고 면역세포가 있는 림프절까지 도달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안정적이어야 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대식세포와 같은 항원제시세포(APC)가 이 항원을 삼킨 뒤 적절히 잘게 쪼개서 T세포가 인식할 수 있는 항원결정기(펩타이드 조각)를 MHC라는 분자 위에 올려놓을 수 있을 만큼 적절히 분해 가능해야 합니다.4 너무 단단해서 분해되지 않거나, 너무 약해서 금방 사라져 버리는 물질은 효과적인 면역 반응을 이끌어내기 어렵습니다. 이러한 조건들이 모두 충족될 때, 비로소 하나의 물질은 우리 면역계가 공격할 명확한 항원결정기를 가진 완전한 ‘면역원’으로 인정받게 됩니다.

면역원성(Immunogenicity)을 결정하는 주요 조건

조건높은 면역원성낮은 면역원성
구분비자기 (Non-self)자기 (Self)
분자량큼 (>10,000 Da)작음 (<1,000 Da)
화학적 복잡성복잡함 (예: 단백질)단순함 (예: 반복 중합체)
분해 가능성적절히 분해됨분해되지 않거나 너무 쉽게 분해됨

참고 자료

  1. Cruse, J. M., & Lewis, R. E. (2010). Atlas of immunology (3rd ed.). CRC press.
  2. Kindt, T. J., Goldsby, R. A., & Osborne, B. A. (2007). Kuby Immunology (6th ed.). W. H. Freeman.
  3. Landsteiner, K. (1945). The Specificity of Serological Reactions. Harvard University Press.
  4. Abbas, A. K., Lichtman, A. H., & Pillai, S. (2020). Antigen processing and presentation to T lymphocytes. In Cellular and Molecular Immunology (10th ed.). Elsevi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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