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해자: 화학적 장벽
우리 몸의 물리적 장벽이 아무리 견고하다 해도, 미세한 틈이나 순간적인 손상은 언제든 발생할 수 있습니다. 만약 성벽만 덩그러니 있다면, 적들은 어떻게든 그 틈을 파고들어 성을 함락시킬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몸은 그렇게 허술하지 않습니다. 물리적인 성벽 주위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강력한 ‘화학적 해자’가 흐르며 2중, 3중의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습니다. 이 화학적 장벽들은 우리 몸의 표면을 병원균이 살 수 없는 치명적인 환경으로 만들고, 침입을 시도하는 적들을 조용히 제거합니다. 이 정교한 화학 무기들이야말로 면역계의 성벽과 해자 시스템을 완성하는 핵심 요소입니다.
피부의 산성 보호막과 살균 부대
건강한 피부는 단순히 물리적인 방패가 아니라, 그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화학 공장이자 특수 부대가 주둔하는 기지입니다.
산성 보호막 (Acid Mantle)
우리 피부 표면은 땀샘에서 분비되는 젖산과 피지선에서 분비되는 지방산 등이 섞여, 약 pH 4.5~5.5의 약한 산성을 띠고 있습니다.1 이를 ‘산성 보호막’이라고 부릅니다. 대부분의 병원성 세균들은 중성에 가까운 환경에서 가장 잘 번식하기 때문에, 이 산성 환경은 그들의 증식을 억제하는 매우 효과적인 ‘오염 지대’ 역할을 합니다. 반면, 우리 피부에 유익한 상재균들은 이 산성 환경에 잘 적응하여 살아가며, 오히려 해로운 균들이 자리 잡지 못하도록 견제하는 역할까지 합니다.
항균 펩타이드 (Antimicrobial Peptides, AMPs)
더 나아가, 우리 피부 세포는 필요할 때 직접 화학 무기를 생산하여 뿌리기도 합니다. ‘항균 펩타이드’라고 불리는 이 물질들은 우리 몸이 스스로 만들어내는 천연 항생제입니다.2 대표적으로 피부 상피세포가 만드는 ‘디펜신(Defensins)’이나 땀샘에서 분비되는 ‘데르미시딘(Dermcidin)’ 등이 있습니다. 이들은 세균의 세포막에 직접 달라붙어 구멍을 뚫거나, 세포 안으로 침투하여 필수적인 기능을 마비시켜 세균을 죽입니다. 마치 피부라는 성벽 곳곳에 ‘특수 살균 부대’가 상주하며, 침입을 시도하는 적을 즉각적으로 사살하는 것과 같습니다.
점막의 특수 화학 무기
외부와 직접 연결된 통로인 점막 역시, 점액이라는 끈끈이 덫 외에도 다양한 특수 화학 무기를 갖추고 있습니다.
라이소자임 (Lysozyme)
우리가 슬플 때 흘리는 눈물, 입안의 침, 콧물 등에는 ‘라이소자임’이라는 강력한 효소가 풍부하게 들어있습니다. 이 효소는 세균의 세포벽을 구성하는 특정 성분(펩티도글리칸)을 분해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3 세포벽은 세균을 외부 환경으로부터 보호하는 갑옷과 같은데, 라이소자임은 이 갑옷을 녹여버려 세균을 무방비 상태로 만들어 터져 죽게 합니다.
락토페린 (Lactoferrin)과 트랜스페린 (Transferrin)
모든 생명체가 살아가기 위해서는 철(Iron)이 필수적입니다. 세균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몸은 이 점을 역이용하여 매우 영리한 ‘보급로 차단 전략’을 구사합니다. 모유, 눈물, 점액 등에 존재하는 ‘락토페린’과 혈액에 있는 ‘트랜스페린’이라는 단백질은 철분과 매우 강력하게 결합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이들은 주변의 철분을 싹쓸이하여 세균이 이용할 수 없도록 만들어버립니다. 보급로가 끊긴 적군이 굶어 죽는 것처럼, 세균 역시 철분을 공급받지 못해 결국 사멸하게 됩니다.
위산 (Stomach Acid)
화학적 장벽 중 가장 강력하고 극적인 예는 바로 위에서 분비되는 위산입니다. pH 1~3에 달하는 강력한 염산(HCl)으로 이루어진 위액은, 우리가 섭취한 음식물과 함께 들어온 대부분의 세균이나 바이러스를 그야말로 녹여버리는 ‘궁극의 화학 용광로’ 역할을 합니다. 이 강력한 산성 장벽 덕분에, 우리는 비교적 안전하게 음식을 섭취할 수 있습니다. 이 또한 우리 면역계의 성벽과 해자가 수행하는 중요한 방어 작전입니다.
화학적 장벽의 주요 무기 요약
화학 무기 | 주요 위치 | 핵심 작용 | 비유 |
---|---|---|---|
산성 보호막 | 피부 표면 | 낮은 pH로 세균 증식 억제 | 오염 지대 형성 |
항균 펩타이드 | 피부, 점막 | 세균 세포막 파괴 | 상주 살균 부대 |
라이소자임 | 눈물, 침, 콧물 | 세균 세포벽 분해 | 갑옷 파괴 효소 |
락토페린/트랜스페린 | 모유, 점액, 혈액 | 철분 흡수하여 세균 생장 억제 | 보급로 차단 전략 |
위산 | 위 | 강력한 산성으로 병원균 사멸 | 화학 용광로 |
참고 자료
- Lambers, H., Piessens, S., Bloem, A., Pronk, H., & Finkel, P. (2006). Natural skin surface pH is on average below 5, which is beneficial for its resident flora. International Journal of Cosmetic Science, 28(5), 359–370. https://doi.org/10.1111/j.1467-2494.2006.00344.x
- Zasloff, M. (2002). Antimicrobial peptides of multicellular organisms. Nature, 415(6870), 389–395. https://doi.org/10.1038/415389a
- Ragland, S. A., & Criss, A. K. (2017). From bacterial killing to immune modulation: Recent insights into the functions of lysozyme. PLoS Pathogens, 13(9), e1006512. https://doi.org/10.1371/journal.ppat.10065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