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血)의 핵심 기능 ②: 정신 활동(神)의 안정적인 토대
지난 시간에는 한의학 혈(血)이 온몸을 영양하고 촉촉하게 하는 ‘자양유윤(滋養濡潤)’ 기능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이는 혈의 가장 기본적인 물리적 역할입니다. 하지만 한의학이 인체를 몸과 마음이 연결된 유기체로 보는 만큼, 혈의 기능 역시 물질적인 차원에만 머무르지 않습니다. 혈은 우리의 정신과 의식, 감정 활동 전반을 주관하는 ‘신(神)’이 안정적으로 머물 수 있는 물질적 토대가 됩니다.[1] 이번 장에서는 ‘혈은 신의 거처’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한의학 혈이 우리의 정신 건강에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지 깊이 있게 탐구해 보겠습니다.
‘혈은 신(神)의 거처’: 정신을 담는 그릇, 혈(血)
한의학에서 ‘신(神)’은 단순히 영혼(spirit)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는 인간의 생명 활동을 총괄하는 주재자로서, 의식, 사유, 기억, 수면, 감정 등 모든 정신 활동을 포괄하는 개념입니다. 그리고 이 중요한 신(神)이 깃들어 있는 곳이 바로 심장(心)이며, 신(神)이 안정적으로 머물기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혈(血)입니다. 그래서 고전에서는 “혈은 신의 거처(血者, 神之舍也)”라고 표현합니다.[2]
이 관계를 집과 사람에 비유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신(神)이 사람이라면, 혈(血)은 그 사람이 편안하게 쉬고 활동할 수 있는 집과 같습니다. 집이 튼튼하고 안락하며 먹을 것이 풍족하면 사람은 평온하게 머물며 안정적인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집이 허물어지고 양식이 떨어지면 사람은 불안해하며 밖을 떠돌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몸에 한의학 혈이 충만해야 신(神)이 심장에 안정적으로 머물며 명료한 정신 활동을 할 수 있습니다. 반면 혈이 부족해지면 신(神)은 기댈 곳을 잃고 불안정하게 흔들리게 되는 것입니다.
심혈허(心血虛): 혈이 부족할 때 마음이 보내는 SOS 신호
이러한 한의학 혈과 정신의 관계는 ‘심혈허(心血虛)’라는 병리 상태에서 가장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심혈허는 심장에 영양을 공급하는 혈액이 부족해진 상태를 말하는데, 이는 단순히 심장 자체의 문제로 그치지 않고 다양한 정신·정서적 증상을 유발합니다.[3]
- 심계(心悸)와 정충(怔忡): 특별한 이유 없이 가슴이 두근거리고, 심하면 스스로 심장 박동이 느껴질 정도로 불안해지는 증상입니다. 이는 심장 근육을 자양할 혈이 부족하여 심장이 과민하게 반응하기 때문입니다.
 - 불면(失眠)과 다몽(多夢): 잠들기 어렵거나, 잠이 들더라도 깊게 자지 못하고 꿈을 많이 꾸며 자주 깨는 증상입니다. 낮 동안 활동하던 신(神)이 밤이 되면 혈(血)이라는 안식처로 돌아와 쉬어야 하는데, 그 집이 비어있으니 편안히 잠들지 못하고 떠도는 것과 같습니다.
 - 건망(健忘)과 사려과다(思慮過多): 기억력이 감퇴하고, 방금 했던 일도 쉽게 잊어버리는 증상입니다. 뇌수(腦髓)와 정신을 자양할 혈이 부족하여 뇌의 활동이 저하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마음이 불안정하여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기도 합니다.
 
이처럼 불안, 불면, 두근거림 등 현대인들이 흔히 겪는 신경정신과적 증상 상당수가 한의학 혈의 부족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마음의 문제를 다스리기 위해 혈을 보충하는 ‘양혈안신(養血安神)’ 치료법을 사용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4]
| 구분 | 혈(血)이 충족한 상태 (血足) | 혈(血)이 부족한 상태 (血虛) | 
|---|---|---|
| 정신 상태 | 정신이 맑고 명료함, 사유가 민첩함 | 정신이 몽롱함, 기억력 및 집중력 저하 | 
| 감정 상태 | 마음이 평온하고 안정적임 | 불안감, 잘 놀람, 초조함 | 
| 수면 상태 | 숙면, 꿈이 적고 개운함 | 불면, 천면(얕은 잠), 꿈을 많이 꿈 | 
| 심장 상태 | 심장 박동이 안정적이고 힘참 | 가슴 두근거림 (심계, 정충) | 
결론적으로, 혈은 단순히 몸에 영양을 공급하는 것을 넘어, 우리의 마음을 안정시키고 건강한 정신 활동을 유지하게 하는 필수적인 물질입니다. 몸과 마음은 둘이 아니라는 ‘심신일여(心身一如)’의 사상을 한의학 혈의 기능은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음 장에서는 이렇게 중요한 혈이 우리 몸속에서 어떤 장부들의 협력을 통해 순환하는지, 그 운행 원리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참고 자료
- 전국한의과대학 생리학교수, 『동의생리학』, 집문당, 2016. “혈(血)은 정신활동의 물질적 기초가 된다. 혈이 충족되어야 심신(心神)이 안정되고 정신이 명료해지며 사유가 민첩해진다.” [도서 정보 확인]
 - 『황제내경(黃帝內經)』, 「영추(靈樞)·본신(本神)」. “심장은 신(神)을 저장한다.” (원문: “心藏神”) 또한 후대 의가들은 이를 발전시켜 “혈맥(血脈)은 신(神)의 거처이다(血脈者, 神之舍也)”라고 설명한다. [원문 검색]
 - 허준, 『동의보감(東醫寶鑑)』, 「내경편(內景篇)·신(神)」. “심혈(心血)이 부족하면 신(神)이 제자리를 지키지 못하여 잘 놀라고 가슴이 두근거리며 잠을 편안히 이루지 못한다.” (원문: “心血不足, 神無所歸, 故善驚悸而不得安臥”) [원문 검색]
 - 한국한의학연구원, 한의학지식정보서비스. “심혈허(心血虛): 주요 증상은 현기증, 얼굴 창백, 가슴 두근거림, 불면, 건망증, 꿈을 많이 꾸는 것 등이며, 치료는 보혈안신(補血安神)하는 방법을 사용한다.” [자료 확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