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血)의 제2 원천: 생명의 뿌리 ‘신정(腎精)’의 역할
우리는 지난 장에서 한의학 혈(血)의 가장 중요하고 일상적인 공급원이 우리가 섭취하는 음식물, 즉 ‘수곡정미(水穀精微)’임을 확인했습니다. 매일의 식사가 혈을 만드는 핵심 재료가 된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합니다. 하지만 우리 몸은 이 후천적인 공급원 외에도, 보다 근원적이고 깊은 차원의 한의학 혈 생성 경로를 가지고 있습니다. 바로 생명의 뿌리라 불리는 신장(腎臟)에 저장된 정(精), 즉 ‘신정(腎精)’입니다.[1] 이번 시간에는 ‘정혈동원(精血同源)’이라는 한의학의 핵심 이론을 통해, 신정이 어떻게 혈로 전환될 수 있는지 그 원리를 탐구해 보겠습니다.
‘정혈동원(精血同源)’: 정(精)과 혈(血)은 그 근원이 같다
‘정혈동원(精血同源)’은 글자 그대로 ‘정과 혈은 그 근원이 같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정과 혈이 서로 완전히 다른 물질이 아니라, 동일한 기원을 가지며 필요에 따라 상호 전환될 수 있는 관계임을 시사합니다.[2] 여기서 말하는 정(精)은 인체의 성장, 발육, 생식 등 모든 생명 활동의 근본이 되는 가장 원초적인 정미(精微) 물질입니다. 특히 신장에 저장된 신정(腎精)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선천적인 에너지(先天之精)와 음식물로부터 얻는 후천적인 영양(後天之精)이 합쳐져 구성됩니다.
그렇다면 신정은 어떻게 혈로 변할 수 있을까요? 그 비밀은 ‘골수(骨髓)’에 있습니다. 한의학에서는 ‘신주골 생수(腎主骨 生髓)’, 즉 신장이 뼈를 주관하고 골수를 생성한다고 봅니다.[3] 신정이 충만해야 뼈 속의 골수도 가득 찰 수 있으며, 바로 이 골수가 혈액을 생성하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합니다. 즉, ‘신정(腎精) → 골수(骨髓) 생성 → 혈(血) 생성’으로 이어지는 경로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한의학 혈의 관점에서, 신정은 혈액의 양이 부족해졌을 때 동원될 수 있는 중요한 예비 자원이자 혈액의 질을 결정하는 근본적인 바탕이 됩니다.
선천과 후천의 조화: 혈 생성의 이중 안전장치
우리 몸의 혈 생성 시스템은 이처럼 이중적인 구조를 통해 안정성을 확보합니다. 비위(脾胃)를 통해 음식물(수곡정미)에서 혈을 얻는 것이 일상적이고 지속적인 ‘후천적(後天的)’ 공급이라면, 신정(腎精)을 통해 혈을 보충하는 것은 근원적이고 비상시를 대비한 ‘선천적(先天的)’ 공급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둘의 관계는 마치 월급과 예금 통장의 관계와 같습니다.
- 후천의 혈 (음식): 매일의 활동에 필요한 에너지를 공급하는 월급과 같습니다. 꾸준히 잘 들어와야 기본적인 생활이 유지됩니다.
 - 선천의 혈 (신정): 갑작스러운 질병이나 큰 수술, 과도한 출혈 등 비상 상황에 대비한 예금 통장과 같습니다. 평소에는 잘 보존해야 하며, 고갈되면 생명의 근간이 흔들립니다.
 
중요한 것은 이 둘이 서로를 보완하고 자양한다는 점입니다. 후천적으로 생성된 한의학 혈이 충만하면 신정을 보충하여 생명의 뿌리를 튼튼하게 하고(혈능생정, 血能生精), 반대로 신정이 충만하면 혈의 생성 능력이 왕성해지고 혈의 질 또한 높아집니다(정능화혈, 精能化血). 결국 건강한 삶이란, 좋은 음식을 잘 섭취하여 후천의 근원을 채우는 동시에, 무리한 활동이나 과도한 스트레스를 피해 선천의 정을 아끼고 보존하는 지혜가 모두 필요함을 의미합니다.
| 구분 | 제1 원천: 수곡정미(水穀精微) | 제2 원천: 신정(腎精) | 
|---|---|---|
| 성격 | 후천적(後天的), 일상적 공급원 | 선천적(先天的), 근원적 저장원 | 
| 핵심 장부 | 비위(脾胃) | 신(腎) | 
| 생성 경로 | 음식 → 수곡정미 → 폐/심 → 혈(血) | 정(精) → 골수(骨髓) → 혈(血) | 
| 주요 역할 | 일상적인 신체 활동과 생명 유지 | 혈액 보충, 성장·발육·생식의 기초 | 
지금까지 혈을 만드는 두 가지 중요한 근원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결국, 우리가 먹는 음식이 곧 피가 되고, 우리가 타고난 생명의 정수 또한 피로 전환될 수 있다는 한의학의 통찰은, 건강한 삶을 위해 우리가 무엇을 먹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깊은 지혜를 전해줍니다. 다음 장에서는 이렇게 만들어진 한의학 혈이 우리 몸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놀라운 기능들을 수행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참고 자료
- 전국한의과대학 생리학교수, 『동의생리학』, 집문당, 2016. “혈의 생성은 수곡정미와 신정(腎精)을 물질적 기초로 한다. 이 중 수곡정미는 혈의 주된 생성원이며, 신정은 혈을 생성하는 또 다른 원천이다.” [도서 정보 확인]
 - 장개빈, 『경악전서(景岳全書)』, 「혈증론(血證論)」. “정(精)과 혈(血)은 형체는 다르나 그 근원은 하나이다. 정이 부족하면 혈로써 보충할 수 없고, 혈이 마르면 정 또한 스스로 생겨날 수 없다.” (원문: “精血同源, 未有精竭而血能生, 血枯而精能獨旺者”) [원문 검색]
 - 『황제내경(黃帝內經)』, 「소문(素問)·음양응상대론(陰陽應象大論)」. “신(腎)은 뼈를 주관하며 골수를 생성한다.” (원문: “腎主骨, 生髓”) [원문 검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