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방 생리학> 1.3.2 한의학 혈(血), 생명을 자양하는 붉은 에너지의 모든 것

혈(血)의 제1 원천: 음식물에서 비롯되는 ‘수곡정미(水穀精微)’

앞서 우리는 한의학 혈(血)의 개념이 단순한 물질을 넘어 기능적인 의미를 갖는다는 점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몸과 마음을 자양하는 이 귀한 혈은 과연 어디에서,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일까요? 한의학에서는 혈의 근원을 크게 두 가지로 보는데, 그중 가장 중요하고 지속적인 공급원이 바로 우리가 매일 섭취하는 음식물입니다.[1] 이번 장에서는 음식물이 ‘수곡정미(水穀精微)’라는 정수(精髓)로 변하고, 마침내 붉은 혈로 완성되는 신비로운 과정을 단계별로 따라가 보겠습니다.

소화의 중심, 비위(脾胃)와 수곡정미의 생성

한의학 혈 생성의 여정은 ‘후천지본(後天之本)’이자 ‘기혈생화지원(氣血生化之源)’, 즉 기와 혈을 만들어내는 근원이라 불리는 비위(脾胃)에서 시작됩니다.[2] 우리가 음식을 섭취하면, 먼저 위(胃)가 그것을 받아들여 잘게 부수고 소화시키는 ‘수납부숙(受納腐熟)’ 작용을 합니다. 마치 솥에 음식을 넣고 끓여 죽처럼 만드는 과정과 같습니다.

그 다음은 비(脾)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비장은 위장에서 1차 소화된 음식물로부터 영양 물질의 정수를 뽑아내는 ‘운화(運化)’ 기능을 수행합니다. 이 과정을 통해 생성된 가장 순수하고 정미로운 영양 물질이 바로 ‘수곡정미(水穀精微)’입니다.[3] 이 수곡정미는 기(氣)와 혈(血)을 만드는 핵심적인 원재료가 됩니다. 만약 비위의 기능이 약해 소화 흡수 능력이 떨어진다면, 아무리 좋은 음식을 먹어도 충분한 수곡정미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이는 곧 한의학 혈 생성의 부실로 이어지게 됩니다.

청기(淸氣)와의 결합, 그리고 심(心)에서의 최종 완성

비장에서 생성된 수곡정미는 그 자체로 혈이 되지 않습니다. 비장의 ‘승청(升淸)’ 기능에 의해 위쪽으로 운반되어 폐(肺)에 도달해야 합니다. 폐에 이른 수곡정미는 호흡을 통해 들이마신 자연의 맑은 공기, 즉 ‘청기(淸氣)’와 결합하는 중요한 단계를 거칩니다. 영양 물질에 생명의 기운이 불어넣어지는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4]

청기와 결합하여 새로운 생명력을 얻은 이 물질은 마침내 혈액 순환의 중심인 심장(心)으로 보내집니다. 심장은 강력한 ‘기화(氣化)’ 작용, 즉 심장의 양기(陽氣)를 통해 이 물질을 비로소 붉은색의 혈(血)로 최종 변환시킵니다. 이를 ‘봉심화적(奉心化赤)’이라고도 표현하는데, “심장에 바쳐져 붉게 변한다”는 의미입니다. 이처럼 한의학 혈의 생성은 비위, 폐, 심장 등 여러 장부의 정교한 협력 하에 이루어지는 복합적인 생명 활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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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계관련 장부주요 기능결과물
1단계비위(脾胃)음식물을 소화, 흡수하여 정미로운 물질을 추출함 (운화작용)수곡정미(水穀精微)
2단계폐(肺)수곡정미를 받아 자연의 맑은 공기와 결합시킴 (호흡)영기(營氣)의 기초 물질
3단계심(心)폐에서 온 물질을 받아 붉은 혈액으로 최종 변환시킴 (화적작용)혈(血)

건강한 식습관이 곧 보혈(補血)의 시작입니다

이러한 혈의 생성 과정을 이해하면, 우리가 매일 무엇을 어떻게 먹는지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됩니다. 혈을 보충하는 것을 ‘보혈(補血)’이라 하는데, 가장 근본적인 보혈법은 바로 비위의 소화 기능에 부담을 주지 않으면서도 영양이 풍부한 음식을 규칙적으로 섭취하는 것입니다. 불규칙한 식사, 폭식, 생랭(生冷)한 음식의 과다 섭취는 비위의 기능을 손상시켜 혈 생성의 원천을 마르게 하는 주요 원인이 됩니다.[5] 결국 건강한 한의학 혈을 유지하는 비결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밥상 위에 있는 셈입니다. 다음 장에서는 혈을 생성하는 또 다른 중요한 원천인 ‘신정(腎精)’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참고 자료

  1. 허준, 『동의보감(東醫寶鑑)』, 「내경편(內景篇)·혈(血)」. “사람이 음식물을 먹으면 비위(脾胃)가 이를 받아 오미(五味)의 즙(汁)을 내는데, 즙이 변화하여 붉어진 것이 혈이다.” (원문: “中焦受氣, 變化而赤, 是謂血”) [원문 검색]
  2. 이동원, 『비위론(脾胃論)』, 「비위허실전변론(脾胃虛實傳變論)」. “비위는 원기(元氣)의 근본이며, 모든 손상병은 반드시 비위를 치료해야 한다. 비위가 상하면 기혈이 모두 쇠약해진다.” [원문 검색]
  3. 전국한의과대학 생리학교수, 『동의생리학』, 집문당, 2016. “비위의 운화기능에 의하여 음식물로부터 흡수된 정미로운 물질을 수곡정미라 한다. 수곡정미는 기혈진액을 생성하는 기본 물질이다.” [도서 정보 확인]
  4. 『황제내경(黃帝內經)』, 「영추(靈樞)·결기편(決氣篇)」. “중초(中焦)는 위(胃)에서 나와 수곡의 기를 받아 붉게 변화한 것을 혈이라 한다.” (원문: “中焦受氣取汁, 變化而赤, 是謂血”) [원문 검색]
  5. 장개빈, 『경악전서(景岳全書)』, 「혈증론(血證論)」. “무릇 혈병을 논함에 있어 그 근원을 모르면 치료할 수 없다. 혈의 근원은 음식에 있으니, 비위가 건전해야 혈이 왕성하게 생성될 수 있다.” [원문 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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