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의학 혈(血)의 개념: 붉은색의 영양 물질 그 이상
지난 글에서 우리는 혈(血)의 불균형이 우리 몸과 마음에 보내는 다양한 신호들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그렇다면 한의학에서 말하는 혈이란 정확히 무엇일까요? 가장 기본적인 정의는 “맥관(脈管) 속을 흐르는 붉은색의 액체”입니다.[1] 이 설명만 들으면 서양의학의 혈액(Blood)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한의학 혈 개념의 진정한 깊이는 그 형태가 아닌 기능적 역할과 인체를 바라보는 전일적(全一的) 관점에서 드러납니다.
서양의학의 혈액 vs. 한의학의 혈(血)
현대의학에서 혈액은 적혈구, 백혈구, 혈소판, 혈장 등으로 구성된 구체적인 물질로 분석됩니다. 주된 역할은 폐에서 받은 산소를 각 조직으로 운반하고, 세포 활동의 결과물인 이산화탄소를 회수하며, 외부 병원체에 대항하는 면역 기능을 수행하는 등 매우 명확하고 분석적입니다. 즉, 혈액을 ‘물질’ 그 자체로 보고 그 구성 성분의 역할을 규명하는 데 중점을 둡니다.
반면, 한의학 혈의 개념은 이러한 물질적 기반 위에 기능적, 추상적 의미를 더합니다. 한의학 혈은 단순히 산소를 운반하는 매개체를 넘어, 전신에 영양을 공급하는 ‘자양(滋養)’ 기능과 인간의 정신-사유 활동을 가능하게 하는 ‘물질적 기초’로서의 역할을 훨씬 더 강조합니다.[2] 다시 말해, 눈에 보이는 혈구 세포 하나하나의 기능보다는, 그 혈이 우리 몸과 마음에서 어떤 현상을 일으키고 생명력을 어떻게 유지시키는가에 대한 ‘작용’에 주목하는 것입니다. 이는 인체를 부분의 합이 아닌, 하나의 유기적 전체로 보는 한의학의 핵심 철학을 반영합니다.
| 구분 | 서양의학의 혈액 (Blood) | 한의학의 혈 (血) | 
|---|---|---|
| 관점 | 분석적 · 구성적 (혈구, 혈장 등 물질 성분에 집중)  | 기능적 · 전일적 (인체 내 작용과 역할에 집중)  | 
| 주요 기능 | – 산소 및 이산화탄소 운반 – 면역 작용 – 호르몬 등 물질 운반 – 체온 조절  | – 전신 자양 및 유윤(濡潤) – 정신 활동의 물질적 기반 – 기(氣)를 운재하는 역할 – 체형 구성의 기본 물질  | 
| 관련 장기 | – 심장(펌프), 골수(생성) 등 각 기관의 독립적 역할 강조  | – 심(心), 간(肝), 비(脾) 등의 유기적 협력 관계 강조[3]  | 
기능으로 정의되는 한의학 혈(血)의 가치
이러한 관점의 차이는 한의학 혈의 개념이 왜 임상적으로 중요한지를 보여줍니다. 예를 들어, 병원에서 시행한 혈액 검사상 모든 수치가 정상 범위에 있더라도, 한의학적으로는 ‘혈허(血虛)’ 진단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는 혈액의 ‘양’이나 ‘구성 성분’에는 문제가 없지만, 온몸을 따뜻하게 하고(溫煦), 촉촉하게 적셔주며(濡潤), 정신을 안정시키는 혈의 ‘기능’이 저하되었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4]
결론적으로, 한의학 혈은 눈에 보이는 붉은 액체를 지칭하는 동시에, 우리 몸의 모든 조직과 기관이 제 기능을 다할 수 있도록 영양을 공급하고, 나아가 우리의 마음과 정신까지 안정적으로 붙들어주는 무형의 ‘에너지’ 혹은 ‘기능’을 포함하는 개념입니다. 이는 몸과 마음을 결코 분리해서 보지 않는 한의학의 깊은 통찰을 담고 있으며, 우리가 건강을 이해하는 방식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어 줍니다. 다음 장에서는 이러한 혈이 구체적으로 어떤 과정을 통해 만들어지는지 그 근원을 탐구해 보겠습니다.
참고 자료
- 신민교, 『원색임상본초학』, 영림사, 2004. “혈(血)은 맥관(脈管) 내를 운행하는 적색(赤色)의 액체(液體)이며, 기(氣)와 더불어 인체를 구성하고 생명활동을 유지하는데 없어서는 안 될 기본적인 물질이다.” [도서 정보 확인]
 - 전국한의과대학 생리학교수, 『동의생리학』, 집문당, 2016. “혈(血)은 전신에 영양물질을 공급하는 자양(滋養)과 유윤(濡潤) 작용을 하며, 또한 신(神)의 사유활동을 뒷받침하는 물질적 기초가 된다.” [도서 정보 확인]
 - 허준, 『동의보감(東醫寶鑑)』, 「내경편(內景篇)」. “심장(心)은 혈맥을 주관하고(心主血脈), 간(肝)은 피를 저장하며(肝藏血), 비장(脾)은 피를 통솔한다(脾統血).” (원문: “心主血脈, 肝藏血, 脾統血”) [원문 검색]
 - 전국한의과대학 한방병리학교실, 『한방병리학』, 일중사, 2011. “혈허는 혈액의 양적 부족뿐만 아니라 혈액의 자양 기능이 감퇴된 병리상태를 가리킨다.” [도서 정보 확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