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증과 기억: 왜 오래된 통증은 사라지지 않을까?
상처는 아물었고, 염증도 사라졌는데 왜 통증은 유령처럼 계속 우리를 괴롭힐까요? 이는 만성 통증 환자들이 가장 절망적으로 느끼는 부분입니다. 그 이유는 통증이 더 이상 신체의 문제가 아니라, 뇌에 깊이 새겨진 ‘기억’이 되었기 때문입니다.1 이번 글에서는 통증이 어떻게 뇌의 구조와 기능 자체를 바꾸어 지워지지 않는 기억처럼 각인되는지, 그리고 이 현상이 만성 통증의 원리를 이해하는 데 왜 그토록 중요한지 심층적으로 알아보겠습니다.
우리 뇌는 고정된 기관이 아닙니다. 경험과 학습을 통해 끊임없이 변하는 놀라운 능력을 가졌는데, 이를 ‘신경가소성(Neuroplasticity)’이라고 합니다.2 새로운 언어를 배우거나 악기를 연주하면 뇌에 새로운 회로가 생기고 강화되는 것처럼, 통증을 반복적으로 경험하는 것 역시 뇌에 강력한 ‘통증 회로’를 만들어냅니다. 이 신경가소성이야말로 만성 통증의 원리를 설명하는 가장 핵심적인 열쇠입니다.
통증 회로, 한번 뚫리면 고속도로가 된다
숲속에 길이 없는 곳을 한번 지나가기는 어렵지만, 여러 사람이 반복해서 지나가면 점차 선명한 오솔길이 생기고 나중에는 넓은 길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통증 회로도 마찬가지입니다. 급성 통증이 발생했을 때 생긴 신경 경로는 일시적이지만, 통증 신호가 반복적으로 이 경로를 지나가면 시냅스 연결이 강화되고 효율성이 높아집니다.3
결국 이 통증 회로는 뇌에 고속도로처럼 단단하게 자리 잡게 됩니다. 한번 고속도로가 뚫리면 아주 작은 자극에도, 심지어는 통증과 관련된 생각이나 감정만으로도 이 회로가 쉽게 활성화되어 통증을 느끼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초기 원인이 사라졌음에도 통증이 지속되는 만성 통증의 원리입니다. 뇌가 통증을 ‘기억’하고 스스로 재현해내는 것입니다.
통증이 뇌를 바꾼다: 만성 통증 환자의 뇌에서 일어나는 일
실제로 최신 뇌 영상 연구들은 만성 통증 환자들의 뇌에서 구조적, 기능적 변화가 일어남을 명확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는 통증이 단순한 심리적 문제가 아니라, 뇌의 물리적인 변화를 동반하는 질병임을 증명합니다.
- 회색질의 위축: 이성적 판단과 감정 조절을 담당하는 전전두피질(Prefrontal Cortex)과 같은 뇌 영역의 회색질 부피가 줄어듭니다. 이는 만성 통증 환자들이 왜 충동 조절에 어려움을 겪고 우울감에 쉽게 빠지는지를 설명하는 중요한 통증의 원리입니다.
- 통증 회로의 과활성화: 통증의 감정적 측면을 담당하는 편도체(Amygdala), 섬엽(Insula) 등은 비정상적으로 항상 활성화되어 있어 작은 자극에도 과민하게 반응합니다.4
- 통증 억제 시스템의 약화: 이전 글에서 배운 우리 몸의 자체 진통 시스템, 즉 하행성 통증 억제계의 기능이 저하되어 통증을 효과적으로 제어하지 못하게 됩니다.
뇌 영역 | 정상 상태의 역할 | 만성 통증 시의 변화 |
---|---|---|
전전두피질 | 이성적 판단, 감정 조절 | 회색질 위축, 기능 저하 |
변연계 (편도체 등) | 감정, 공포 반응 | 과활성화, 통증에 대한 감정적 고통 증폭 |
하행성 억제계 | 자체 진통제 분비, 통증 억제 | 기능 약화, 통증 조절 능력 상실 |
이러한 뇌의 변화를 이해하는 것은 만성 통증 치료의 방향을 결정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치료의 목표가 단순히 말초의 통증 신호를 차단하는 것을 넘어, 잘못 형성된 뇌의 통증 회로를 ‘재훈련’시키는 것으로 확장되어야 함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인지행동치료, 명상, 점진적 운동 노출 등이 강조되는 이유도 바로 이 신경가소성이라는 통증의 원리에 기반합니다. 뇌는 변할 수 있기 때문에, 올바른 훈련을 통해 통증 회로를 다시 약화시키고 건강한 회로를 강화할 수 있는 희망이 있습니다.
다음 글에서는 지금까지 다룬 통증의 원리를 총정리하고, 환자가 통증을 지혜롭게 관리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실질적인 조언으로 이번 시리즈를 마무리하겠습니다.
참고 자료
- Apkarian, A. V., Hashmi, J. A., & Baliki, M. N. (2011). “Pain and the brain: specificity and plasticity of the brain in clinical chronic pain”. Pain, 152(3 Suppl), S49–S64.
- Flor, H. (2012). “New insights into the phantom phenomenon”. Journal of the German Society of Dermatology, 10(10), 711-721.
- Moseley, G. L., & Flor, H. (2012). “Targeting cortical representations in the treatment of chronic pain: a review”. Neurorehabilitation and neural repair, 26(6), 646–652.
- May, A. (2008). “Chronic pain may change the structure of the brain”. Pain, 137(1), 7–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