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고난 유전자?: HLA-B27의 두 얼굴
염증성 허리 통증의 원인을 파고들다 보면, 반드시 마주치게 되는 이름이 있습니다. 바로 ‘HLA-B27’이라는 유전자입니다. 많은 환자들이 이 유전자 검사 결과를 듣고 “그럼 저는 유전병인가요?”, “이제 평생 아프게 살아야 하나요?”라며 큰 충격과 불안에 빠지곤 합니다. 하지만 이 유전자의 진짜 의미를 알면, 불필요한 공포에서 벗어나 질병을 더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HLA(Human Leukocyte Antigen, 인간 백혈구 항원)는 우리 몸의 모든 세포 표면에 존재하며, 면역 체계가 ‘나(self)’와 ‘나 아닌 것(non-self)’을 구별하게 해주는 일종의 ‘주민등록증’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HLA-B27은 수많은 HLA 종류 중 27번째로 발견된 유전자 타입입니다. 이 유전자의 주된 임무는 세포 안으로 침입한 바이러스나 세균의 조각을 면역세포(T세포)에게 보여주어, “여기 침입자가 있으니 공격하라”고 알리는 것입니다.[1]
강력한 연관성: 하지만 ‘원인’은 아니다
1970년대 과학자들은 강직성 척추염 환자들의 90% 이상에서 이 HLA-B27 유전자가 발견된다는 놀라운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일반 인구에서 이 유전자를 가진 비율(한국인의 경우 약 5~6%)에 비해 압도적으로 높은 수치였고, 이로 인해 HLA-B27은 염증성 허리 통증과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는 핵심적인 유전적 인자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2]
하지만 여기서 가장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HLA-B27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모두 강직성 척추염에 걸리는 것은 절대 아니라는 점입니다. HLA-B27 양성인 사람 중 실제로 병이 발생하는 경우는 1~5%에 불과합니다.[3] 이는 HLA-B27이 질병의 ‘유일한 원인’이나 ‘확진 유전자’가 아니라, 병이 발생할 가능성을 높이는 ‘강력한 위험인자(Strongest risk factor)’임을 의미합니다. 마치 특정 유전자가 암 발생 위험을 높이지만, 그 유전자가 있다고 모두 암에 걸리는 것이 아닌 것과 같습니다.
오해 | 진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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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LA-B27 양성이면 강직성 척추염이다.” | 아닙니다. HLA-B27 양성인 대다수의 사람들은 평생 건강하게 살아갑니다. |
“HLA-B27은 나쁜 유전자다.” | 아닙니다. 원래는 외부 침입균을 방어하는 정상적인 면역 기능을 수행하지만, 특정 조건에서 자가면역 반응에 관여할 뿐입니다. |
“HLA-B27 음성이면 강직성 척추염이 아니다.” | 아닙니다. 드물지만(약 5~10%), HLA-B27 음성이면서도 다른 유전적, 환경적 요인으로 인해 강직성 척추염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
왜 문제를 일으키는가?: 가설들
그렇다면 왜 유독 HLA-B27이 염증성 허리 통증과 관련이 깊을까요? 아직 완벽히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여러 가설이 존재합니다. HLA-B27 분자가 제대로 접히지 않아(misfolding) 세포에 스트레스를 주고 염증 반응을 유발한다거나, 특정 세균의 단백질 조각과 우리 몸의 단백질을 혼동하여 면역계의 오작동을 일으킨다는 등의 이론이 유력하게 거론되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HLA-B27 유전자 검사는 염증성 허리 통증이 의심되는 환자, 특히 X-ray 소견이 명확하지 않은 조기 단계의 환자를 진단하는 데 매우 유용한 ‘참고 자료’입니다. 하지만 이 검사 결과 하나만으로 환자의 운명이 결정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의사는 이 유전자 검사 결과와 함께 환자의 특징적인 증상, 다른 혈액 검사, 그리고 영상 검사 소견을 모두 종합하여 최종적인 진단을 내리게 됩니다.
다음 장에서는 이처럼 복잡한 염증성 허리 통증을 진단하기 위해, 병원에서 실제로 어떤 검사들이 어떤 순서로 이루어지는지, ‘진단의 여정’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참고 자료
- Khan, M. A. (2009). HLA-B27 and its subtypes in world populations. Current Opinion in Rheumatology, 21(4), 362-367. https://journals.lww.com/co-rheumatology/Abstract/2009/07000/HLA_B27_and_its_subtypes_in_world_populations.10.aspx
- Reveille, J. D. (2015). Genetics of spondyloarthritis–beyond the MHC. Nature Reviews Rheumatology, 11(7), 423-431. https://www.nature.com/articles/nrrheum.2015.66
- Braun, J., & Sieper, J. (2007). Ankylosing spondylitis. The Lancet, 369(9570), 1379-1390. https://www.thelancet.com/journals/lancet/article/PIIS0140-6736(07)60635-7/fulltext